vincent van gogh

고흐3

jimeta 2009. 11. 9. 17:59

 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저), 1999.12.29, 소나무에서

 

아를의 노란집 1888-1889

 

노란 집 1888년

  

 노란 집 실제 모습 - 2차 대전 때 소실

 

 

 

 

 

 빈센트는 왜 아를로 갔을까? 태양을 찾아서...그것은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화가 공동체라고 하는 그의 꿈을 이루고, 자신이 평생 열망한 농민화가가 되기 위해서였다

 

 '우선 이 고장의 공기는 맑아서 그 명쾌한 빛깔에서 받는 인상은 일본을 연상케 한다네. 물은 깨끗한 에머랄드빛 파문을 만들고, 우리가 일본 판화에서 보았던 풍부한 파랑을 풍경에 더해 주네. 엷은 오렌지 빛 석양은 흙을 파랗게 느끼게 한다네.

....모두들 함께 산다면 더 싸게 될 지도 몰라-태양과 색채를 그리워하는 예술가들에게는 어쩌면 남프랑스로 이주하는 편이 실제로 유리할 지도 모르네. 만약 일본인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그들의 예술을 아직 발전시키지 못했다면 마땅히 그 예술은 프랑스에서 계승될 걸세. - 1888년 3월,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특별한 빛을 보고 싶다는 욕망, 자연을 더욱 밝은 하늘 아래에서 보면, 일본인이 느끼고 그린 것과 같이 오직 정확한 이념을 갖게 이념을 갖게 되리라는 신념으로 그는 아를에 왔다. 그렇게 바란 찬란한 태양처럼 아를에서의 빈센트 역시 찬란한 성숙기였다. 1888년 2월 20일부터 1889년 5월 3일까지 1년 두 달 반, 그는 190점의 유화를 그렸다.

 

 그는 하숙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매춘굴을 다니면서 그 마을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진실한 관계를 여성에게서 추구했다가 좌절한 그는 육체적인 관계만 맺었으나, 차차 라셀 Rachel이라는 조용한 창녀와 친해지기 시작했고, 그녀와 함께 삶을 나누었다.

 

 '망명적인 존재, 사회의 폐물...., 예술가들처럼 그녀도 우리의 친구이고 누이동생일세.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 그녀도 폐물의 처지에서 착실한 독립을 하려 한댔자 조금도 이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1888년 8월 초손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그곳에서 <랑글르와 다리 Langlois Bridge >를 그렸다. 푸른 물과 황색의 다리가 선명한 대조를 보여 색채를 해방시킨 듯한 그림이었다. 다리라는 소래와 그 분명한 윤곽선 그리고 원색의 구사는 일본 판화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를 자체를 일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러나 터치는 그만의 것이었다. 물은 재빠르게, 풀은 예리하게 표현했다. 좋은 대로 그리고 느끼는 대로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을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아직도 인상파의 영향은 남아 있었다. 빈센트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예술이 인상파적이며 일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 두 가지는 그에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을 '프랑스의 일본인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것들을 벗어나고 있었다. 섬세한 관찰에 의한 밝은 색조의 인상파적 구사에서 벗어나 순색의 격렬한 색조를 구사했던 것이다.

 

 The Langlois Bridge at Arles with Women Washing Oil on canvas, 1888

 

Van Gogh The Langlois Bridge 1888

 

 

The Langlois Bridge

 

 '파리를 떠날 때 나는 알코올 중독에 걸리는 지름길을 가고 있었다. 그 후 혼이 났다. 술을 끊고 담배를 줄이며 생각을 접어버리는 것 대신 반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참으로 우울해서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기가 막힌 자연 속에서의 작업은 내 정신을 지탱해 준다....

 우리들의 우울증이나 그 밖의 것은 너무나 예술적인 우리들의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며, 숙명적인 유산이기도 하다. 지금 문명 사회에서 사람은 대대로 약해져 가고 있다.' - 1888년 5월 4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8년 6월 지중해 생트 마리-드-라-메르 Saintes-Maries-de-la-Mer 해안으로 여행을 떠났다. 처음 본 지중해는 강렬한 충격이었다. 더욱 유려하고 대담하게 그는 스케치에 몰두했다. 그곳 그림에는 그가 지금까지 동경했던 꿈의 색채가 나타났다.

 

 '지중해의 색은 빛나는 고기와 같다. 너무나도 변하기 쉽기 때문이다. 초록이라고도 할 수 없고 보랏빛이라고도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청색이라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빛의 변화로 금방 핑크로 회색으로 물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밤, 나는 인적이 드문 해안을 따라 걸었다. 즐겁지도 않았지만 슬프지도 않았다. 그냥 아름다웠다. 짙푸른 하늘 여기저기에는 짙은 코발트 원색의 푸른색보다도 더욱 푸른 구름과, 더욱 밝은 은하의 창백함을 닮은 푸른 구름이 떠 있었다. 그 창공 깊숙이 별이 여기저기서 빛났다. - 녹색, 황색, 백색, 장미색 - 파리에서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보석과 같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바다는 실로 깊은 군청색이었다.' -1888년 6월 22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지중해에서 본 아프리카의 환상은 아를에 돌아와서도 강렬한 색채로 재현되었다. 황색 들판에 황색 건초더미에 황색 집이 온통 황색으로 파도치고, 밀레를 모사한 씨부리는 사람의 그림에는 보라색 터치가 황색과 강렬한 조화를 이루고 그 위에는 불타는 태양이 빛났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일본 판화의 색채였다.

 

 

 Vincent-Van-Gogh-The-Postman-Roulin-1888

 

 테오는 빈센트의 그림을 네덜란드의 전시회에 출품했으나 한 점도 팔리지 않았다.  <테이블에 앉은 조셉 룰랭>은 소크라테스나 톨스토이를 연상시키는, 빈센트가 그리고자 한 서민의 전형이다. ...아를에서의 그림은 색채의 해방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새로운 것이었다. 대담한 색으로 고양된 격렬함, 확고하고 분명하며 향상된 이미지가 분명히 드러났다. 빛은 이제 사물을 억압하고 해체시키는 외재적인 힘이 아니라, 사물이 본래 지닌 강렬한 색깔의 고유한 광휘로서 형태만큼이나 확실하게 사물들을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법상의 변화에 불과했다. 그는 여전히 인간에 대한 탐구를 계속했다.

 

 '나의 모든 창작 활동은 어떤 의미에서 일본 미술에 기초를 두고 있으나 우리는 일본 판화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다. 일본 자체에서는 미술의 쇠퇴기에 있고, 작품은 수집가 때문에 사장되어 일본 자체에서도 발견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일본 미술은 다시 프랑스의 인상파 예술가 사이에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프랑스를 통해서 일본인에 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일본의 미술은 원시 미술, 그리스 미술, 또 우리들 과거의 네덜란드 미술- 렘브란트, 할스, 로이스달과 같은 것이다.'- 1888년 7월 22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빈센트는 열심히 그림을 그렸으나 그 삶은 언제나 공허했고 미칠 것같이 괴로웠다. 그러나 자신이 창조적인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했다.

 

 ' 설령 우리들이 살고 있는 시대를 위대하고 진실된 예술 부흥기라고 생각해도, 고답적이고 관료적인 전통은 아직도 무능과 무기력한 상태로 그나마 지속되고 있으며, 새로운 화가들은 빈곤하며 광인처럼 취급받고 있다. 그리고 그런 취급에 의해 적어도 사회 생활에 관한 한 실제로 광인이 되고 있다....

 내가 돈을 쓰면서 광인 취급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만큼 나는 하나의 예술가가 되어 간다 - 창조적인 예술가가.' - 1888년 7월 29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8월이 되자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빈센트는 고갱을 맞고자 노란 집에 걸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갱은 백마를 타고 오는 신랑이 아니라 너무나도 타산적인 장사꾼이었다.

 

 해바라기 1888년

 

 

 

 빈센트는 파리에서도 해바라기를 그린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태양을 쫓아 절규하는 황색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는 황색의 테이블 위에 있는 황색의 꽃병에 황색의 해바라기였다. 폭력적일 정도로 생명력에 불타는 새로운 해바라기였다. 그리고 자기 희생에 의한 죽음, 황색의 자살까지 그것에 담겨졌다. 그것은 놀라운 생명의 원천인 프로방스의 태양과 악귀처럼 격렬한 태풍 속에서 삶과 죽음을 공존시킨 꽃이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짙은 블랙 커피를 몇 잔이아 마시고 몸으로 고통을 느끼면서 그리는 가운데 황색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것은 언제나 위험한 게임이었다. 해가 뜨면 질 때까지 온종일 죽도록 그림을 그리고, 밤이 되면 머리가 아파올 때까지 독한 압셍트를 마시고서 창녀를 찾거나 집에 돌아와 테오에게 편지를 썼다.

 

 밤의 카페 1888년

 

 9월이 되자 <밤의 카페>를 그렸다. 카페는 인상파들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으나, 그들이 그린 쾌적한 부르주아적 카페와는 달리 어둡고도 불안한 카페였다. 거칠고도 충만된 도덕심은 마치 <감자 먹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연상하게 했으나 역시 그 분위기와도 달랐다.

 

 '나는 빨강과 초록으로 인간의 무서운 열정을 표현하려고 했다. 방은 핏빛 빨강색과 짙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고 그 한가운데에 초록색의 당구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오렌지색과 초록색 빛을 발하는 네 개의 옅은 노란색 등불이 있다. 보라색이나 파랑색의 옷을 입고 잠들어 있는 보잘것없는 불량배들의 얼굴에 나타나 있는 보색 관계인 빨강과 초록의 충동과 대비는 그 황량하고 텅 빈 방 안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당구대의 핏빛 빨강색과 쑥색은 장미색의 꽃다발이 그 위에 놓여 있는 카운터의 부드럽고 연한 로코코풍 초록색과 대조를 이룬다. 이곳 한 구석에서 밤새 일하는 지배인의 하얀 코트는 연한 노란색이나 밝은 연두색 빛을 발한다.

 나는 카페란 자아를 파멸시킬 수 있고 미쳐 버리게 하거나 죄를 범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말하자면 나는 저속한 술집이 지니고 있는 어둠의 힘들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리고 악마의 용광로와 같은 옅은 황록색 분위기 속의 이 모든 것들을, 즉 일본인들의 명랑함과 타타르인의 좋은 기질을 보여주는 외관 밑에 숨어 있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자 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밤의 노천 카페>도 그렸다. '밤은 낮보다 더 생기에 넘치고 색채도 더 화려하다' 녹색과 빨강의 주조였던 <밤의 카페>와 달리 이 그림의 색채는 더욱 풍부하고 더욱 시적이었다.

 

 

밤의 노천 카페 1888년 9월

 

고흐의 카페 최근 모습

 

고흐의 카페 최근 모습

 

 우리는 흔히 빈센트를 원색의 화가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어느 그림에서도 원색을 그대로 칠한 적은 없다. 오히려 그의 색체는 언제나 우아하고 매혹적이었다. 또한 그의 그림을 정열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색채는 언제나 차가운 색조였고 그 위에 따뜻한 색조를 배치하는 식이었다. 오히려 그의 그림은 세잔처럼 화면을 논리적으로 구축한 것이 아니라, 붓놀림의 리드미컬한 집적으로 동적인 구도를 형성했기에 보다 정서적으로, 또는 내면적인 감정의 호소로 보였다.

 

 아를의 화가 침실 1888년

 

 10월, 신부처럼 고갱을 기다리며 그는 꽃에 이어 <아를의 화가 침실>을 그렸다. 거친 나뭇결의 침대와 소박하게 그려진 의자나 탁자 같은 가구들이, 반쯤 열린 창과 이상하게 걸린 액자들과 캔버스 위에 높이 솟아 있는 이 그림은, 돌진하는 선과 함께 기묘한 조화를 이룬 그림이었다. 휴식과 수면을 묘사한 그것은 <밤의 카페>가 풍기는 파괴와 광기의 이미지와는 전혀 반대되는 것이었다.

 

 '단순화가 사물에 보다 더 큰 양식을 준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그림에서 휴식이나 수면을 암시하고 싶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이 그림을 보면 누구나 다 머리를 쉬고 상상력을 쉬도록 그리고 싶다.

벽은 엷은 바이올렛, 마룻바닥은 빨간 벽돌색.

침대 및 의자의 나무 색깔은 신선한 버터가 가진 황색, 시트와 베개는 극히 산뜻한 푸른 빛이 나는 레몬색.

침대의 윗걸이는 진홍색, 창은 녹색.

화장대는 오렌지색. 물병은 청색.

문은 라일락색.'- 1888년 9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해바라기>, <밤의 카페>, <아를 화가의 침실> 이것들은 전통적인 관점, 모델링, 분석, 색채 등을 모조리 파괴하는 혁명적인 작품들이었다. 물론 그 어느 것이나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88년 10월 23일, 고갱은 아를에 도착했다. ...당시 고갱의 나쁜 태도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는 좋은 것은 전부 자신 탓이고 나쁜 것은 모두 빈센트  탓이라고 하는 교만한 태도로 일관했기에 오히려 독자들은 그 내용을 반대로 이해하기도 했다.

 

 당시 고갱도 고독했고, 당시로서는 무시된 전위적인 예술을 창조했으며, 따라서 자신의 예술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에 대해 불안해 했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두 사람은 테오가 보내주는 돈으로 살았다. 돈의 관리는 고갱의 몫이었다....고갱은 빈센트가 자신이 숭배하는 라파엘, 앙그르나 드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반면 빈센트가 숭배하는 밀레나 도비니 그리고 루소를 고갱은 용납할 수 없었다.

 

 "Starry Night over the Rhone River, 1888, Arles"

 

  1888년 12월 23일 일요일 밤 11시반, 아를의 창녀촌 1번 집의 라셀은 빈센트에게 불려나가 그로부터 무엇을 잘 맡아 달라는 말을 들었다. 피범벅의 붕대를 머리에 두른 빈센트는 곧 사라졌다. 그녀가 신문지를 펼치자 잘린 귀가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실신했다. 다음 날 경찰이 빈센트가 사는 노란 집에 가보니 그는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빈센트는 곧 병원에 수용되었으나 귀를 다시 붙일 수는 없었다. 상처를 꿰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으나, 이번엔 정신 상태가 위험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오른손으로 칼을 잡고 왼쪽 귀를 거의 완전하게 도려낸 것이었다....

 

(폴라첵에 나오는 에른스트 와르딩게르의 <잘려진 귀의 담시>에서는 고갱이 빈센트의 자화상을 보고 '이것이 귀란 말인가. 이러고도 자네는 그림을 그린다고 할 수 있나!, 자화상이라고? 귀가 전혀 달라!'라고 비난한 것을 그 원인으로 들고 있다.)

 

 빈센트는 다시 그림을 그렸다. 거울을 들여다보며 그린 자화상은 실제와는 거꾸로 오른쪽 귀를 붕대로 동여맨 거친 모습이었다. 그 표정은 자신 사로잡힌 광기에 대한 공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연민이 아닌 자기 분석의 그것이었다. 나아가 강렬한 보색을 사용하여 스스로 그 공포를 이겨내겠다는 굳은 결의를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배경의 적색 앞에 녹색의 코트, 푸른색 모피 모자에 대한 오렌지색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예술과 현실은 분명히 구별되었다. 그림에서 자신은 단호한 모습이었으나, 현실의 자신은 너무나도 유약했다....독살 환상에 사로잡혀 있어서 식사와 잠은 병원에서 한다는 조건이었다. 병원에서는 동료들과 지낼 수 있게 되자 빈센트는 술을 끊고 커피도 줄이게 되었다. 엄청난 술과 커피는 고독에서 온 것이었다...그러나 시민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특히 독살 환상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들의 적대감은 더욱 커져 미친 그를 추방해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아이들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시민들은 시장에게 그가 과음을 하며 아이들과 여자들을 불안하게 하므로 병원에 수용되어야 한다는 탄원서를 보냈다....그후 그는 아를 사람들을 '식인종'이라 부르며 경멸했다.

 

 (시냐크가 찾아와) 저녁이 되어 술을 마시면서 취한 빈센트가 유화 기름으로 사용하는 테레핀유를 마시려고 했다. 시냐크는 서둘러 그를 병원에 데려가 입원시키고 다음날 떠났다....당시 빈센트를 찾아온 유일한 화가였다.

 빈센트는 병원의 정원을 그렸다. 그림을 선물하고자 했으나 누구도 즐겨 받지 않았다.

 

 '배타성을 없애주는 점에서 광기는 축복받아야 한다...'1859년 5월 3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귀에 붕대감은 자화상 18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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