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ncent van gogh

고흐2

jimeta 2009. 11. 8. 19:26

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저), 1999.12.29, 소나무에서

 

 넷째 마디 - 방황

앤트워프 파리 시대,1885-1888  

 

 1885년 11월 말, 빈센트는 시원섭섭한 마음으로 영원히 조국을 떠난다...엔트워프에 있던 짧은 시간 동안 그의 그림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그곳에서 빈센트튼 루벤스의 그로테스트할 정도로 인간적이면서도 숭고한 색조에 깊은 감명을 받는다...

 원색의 사용은 대담한 윤곽선과 원색을 사용한 일본 판화를 보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일본 판화의 매력은 빈센트가 런던에 살 때부터 런던과 파리에서 널리 알려져 새로운 색채와 형태의 신선한 표현법을 낳는 계기가 되었고 휘슬러나 모네도 그것을 모방했다...빈센트는 일본 판화에서 색채를 해방시키는 힘을 발견하고, 그것에 매료되었다. 다행히 판화는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빈센트도 몇 장을 사서 하숙집을 장식했다.

 

Utagawa Kunisada (1786 - 1865) (Japanese: 歌川国貞, also known as Utagawa Toyokuni III 三代歌川豊国 ) was the most popular, prolific and financially successful designer of ukiyo-e woodblock prints in 19th-century Japan. In his own time, his reputation far exceeded that of his contemporaries, Hokusai, Hiroshige and Kuniyoshi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古今名婦傳 白菊姫

 

御上洛東海道 掛川

 

浅草金龍山 

 

Kunisada_futamigaura

 

 

Japanese Kabuki Woodblock Print by Kunisada I - 1857  

  

 빈센트는 그림을 제대로 배워 보겠다고 아카데미에 들어갔으나 거기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었다. 1886년 1월, 아카데미에 들어간 빈센트는 팔레트를 살 돈이 없어 아무렇게나 만든 나무판을 들고 속사포를 쏘듯 격렬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진부한 농민화를 그렸던 아카데미의 교장은 빈센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빈센트에게 데생반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빈센트는 수치심과 분노에 떨며 당장 데생반으로 옮겼다....드디어 폭발이 일어났다. 미로의 비너스를 그리는 수업 시간에 그는 엉덩이가 큰 시골 여인의 나체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그렸다. 선생이 그것을 찢다 빈센트는 너는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여자에게는 엉덩이와 아이를 키울 자궁이 있다고 소리쳤다....

 아카데미 생활은 한 달만에 끝났다. 그리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빈센트의 사회 사상은 19세기의 수많은 예술가, 저술가, 철학자들이 공유한 낭만적인 반자본주의의 그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낡은 구두 1886년

 

 1886년 말 <낡은 구두>를 그렸다. 그것은 빈센트 이전에는 밀레만이 그림의 소재로 생각할 수 있는, 삶을 그대로 드러내는 소재였다. 구두 그림은 아직도 네덜란드의 내음을 가졌지만 그 붓놀림은 더욱 격렬하게 교차했고 색채도 더욱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을 응시하고 있으며, 이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로움이 깃들어 이싸.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어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는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아기의 출산에 임박한 초조함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 스며들어 있다.' -하이데거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by George Seurat 1886

 

 Sunday Afternoon on La Grande Jatte. Georges-Pierre Seurat

 

 쇠라의 화풍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모네나 르누아르가 순간적인 광선의 미묘한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한 것과 반대로 쇠라는 그 문제 접근했다. 즉 쇠라에게 순간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견고한 것으로 표현되었다. 그 성공의 비밀은 색채의 선택에 있었다. 그는 투명한 빛에 나부끼는 오후의 조용한 밝음을 표현하는 데 성공했다...쇠라는 전통적인 미술 교육을 받은 냉정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직감에 의존하는 인상파에는 과학적인 명석함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과학적 진보에 대한 신뢰라고 하는 그 시대 분위기에 젖어 예술에도 그것을 응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쇠라의 그림은 빈센트에게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빈센트를 고갱이나 세잔과 함께 흔히 '후기 인상파'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일반적으로 미술사에서 빈센트와 인상파의 관련을 강조하는 것에 의문을 갖는다. 이 말은 1910-11년 영국에서 열린 '마네와 후기 인상파'라는 전시회 이름에서 비롯된 것인데, 그 원어인 Post Impressionism을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Post란 '이후'를 뜻하므로 그 말은 오히려 '인상파 이후'로 이해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인상파는 원초의 시각적인 자연 상태를 추구했다. 즉 아카데미즘의 선험적인 규범으로부터도, 아틀리에에서의 경험적인 이상화로부터도 해방된 자유로운 감각과 지각을 추구했다.

 

 파리에서 빈센트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6년 전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자신의 고통이 아직도 부족하다고 무릎을 끓고 빌면 울던 남자가 이제는 유럽에서도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 술을 마시면서 마음껏 어울려 놀았다. 특히 당시 그는 마약과 같았던 압셍트에 중독되다시피 했다.

 

 인상파의 영향으로 이제 민중을 위하여 민중을 그리는 예술을 하고 싶다던 그의 갈망은 자취를 감춘 것처럼 보였다. 민중의 모습은 전체 구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요소로만 작게 그려졌고, 무대 장치의 일부에 불과한 듯했다. 대신 빈센트 특유의 짧고 예리한 선이 정열적으로 소용돌이처럼 현기증을 불러일으킬 듯 그어져 강렬한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러한 소용돌이 기법은 그 자신의 당시 삶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술에 취했고 더욱 황당한 짓을 저지르기 일쑤였다. 그래서 테오는 참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난 테오는 만일 자신이 형을 버린다면 그것은 그의 예술마저 파괴하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테오는 형의 그림에 독특한 개성이 살아남을 가능성을 발견하고 희망을 가졌다.

 

 쇠라와 빈센트는 흔히 지극히 대조적인 화가로 비교되어 왔다. 예컨대 전자는 전형적인 프랑스 출신의 도시인이자 코스모폴리탄이다. 여기에 비해 빈센트는 자연과 시골의 인간이다. 또한 전자는 너무나도 그 기질과 예술에서 지극히 냉정하고 비정서적이다, 후자는 불안하고 정열적이다. 그래서 전자의 그림은 고전적이고 규범적이나, 후자는 낭만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다.

 

 쇠라의 경우 부르주아의 묘사는 자본주의를 예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철저이 경멸한 풍자적인 것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그랑 쟈트섬의 일요일 오후> 분석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예리하게 지적한 바 있다.

 

 '쇠라의 산책하는 사람들의 그림 <그랑 쟈트섬의 일요일 오후>에 나타나 있는 것은 마네의 <풀밭의 식사>의 부정으로서, 달리 말하자면 오히려 거기에는 마네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분위기는 상당히 약해져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것은 권태를 그린 한 장의 모자이크화이고 '무위의 즐거움'의 모순과 실망을 나타내는 걸작이다. 그 그림은 일요일 아침 파리 근교의 세느섬에 모인 중산 계급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 점이 중요하다. 즉 그들은 단지 경멸의 시럼에서 그려진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중산 계급 사람들의 일요일 오후는 그림으로 그려진 자살의 풍경과 같다. 단지 그것이 실행되지 않은 것은 결심이 서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다. 곧 이 '무위의 즐거움'에 나타나는 것은 만약 의식된다면, 일요일의 유토피아에 남겨져 있는 전혀 비일요일적인 의식이다.'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다 

Utagawa Hiroshige (歌川広重?, 1797 – October 12, 1858) was a Japanese ukiyo-e artist, and one of the last great artists in that tradition. He was also referred to as Andō Hiroshige (安藤広重) (an irregular combination of family name and art name)[1] and by the art name of Ichiyūsai Hiroshige (一幽斎廣重)-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iroshige Man on horseback crossing a bridge 

 

left: Hiroshige, "The Plum Garden in Kameido"1857  right: Van Gogh, "Flowering Plum Tree" 1887

 

 left: Hiroshige, "Great Bridge, Sudden Shower at Atake" right: Van Gogh, "The Bridge in the Rain"

 

꽃피는 자두나무 1887년

 

 우키요에로 불린 일본 판화는 서민을 위한 값싼 목판화였다. 일본에서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직전인 에도시대(1608-1868)의 한 유파가 낳은 것이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그것은 기타가와 우타마로(喜多川歌 1753-1806)와 우타가와 도요하루(歌川豊春 1760-1849)의 인물 판화, 그리고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 1760-1849)와 안도 히로시게(安藤曠重 1797-1858) 등의 풍경 판화로 대성되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의 내용은 욕망에 들뜬 사회 풍속과 인간 묘사를 주로 한 것이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어떻게 빈센트의 취향과 일치했는지는 참으로 의문이다. 그러나 빈센트에게 문제는 그런 소재가 아니었고 그 단순한 형태와 색채였다.

 

 그것은 18세기말 네덜란드 상인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1876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우타가와파의 작품이 대량 출품되어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것은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일본 판화에서 볼 수 있는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기묘한 시각, 대담한 색채 사용, 물과 다리의 모티브 등의 채용이 그 보기였다.

 모네는 일본 것이라면 광적으로 수집했고 기모늘 입고 부채를 든 아내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값싼 일본 판화집을 수집하는 것은 유파에 관계없이 당시 화가들에게 공통된 유행이었다. 벌써 일본을 방문한 전문 수집가도 생겼다. 그것은 일본 판화가 서양인 그때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빈센트에게 그것은 더욱 중요한 의미로 다가왔다. 곧 그는 일본 판화가 대중이 간단하게 구입할 수 있는 예술을 창조하고자 헌신하는 예술가 길드에 의해 제작되었다고 믿었다. ...

 

 그러나 누구보다도 빈센트가 받은 영향이 가장 컸다 먼저 그는 일본 판화로부터 원근법에 관한 서구의 규범을 파괴하게 되었다.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각도로 걸려 있는 히로시게의 다리를 그린 그림은 빈센트의 아니엘 철교 그림에서 재현되었다.

 빈센트에게 더욱 중요한 영향은 단순하고 선명한 색조와 평면적 처리 방법이었다. 원색을 사용하여 투명하고 명쾌한 색채는 음영을 그리지 않는 일본 회화의 전통 탓으로 더욱 명백하게 보였다. 그래서 빈센트의 팔레트는 더욱 밝게 변했다. 나아가 일본 판화는 사실적인 입체구성이 아니라 단순한 평면 구성이었다.

 

 1887년 봄에 그려진 <꽃피는 자두나무>는 선명한 색체의 점묘로 채워져 인상파와 점묘파의 중간이라는 느낌을 주나, 위에서 보듯이 그 기본은 일본판의 영향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껍질에서 벗어나 모든 고뇌를 잊은 것처럼 보였다. -내 친구 빈센트(박홍규)에서

 

 파리의 인간탐구

 

 이제 인상파가 된 빈센트는 더 이상 밀레의 제자가 아닌 것처럼 보였다. 1887년 5월에 열린 밀레 전시회를 보고서도 그는 과거처럼 감동하지 않았다....이제 그에게는 소재보다도 색채나 구도가 더욱 중요해졌다. 

 

탕기 아저씨의 초상화 Portrait of Pere Tanguy 1887-8

 

 The Italian Woman with carnations 1887-8

 

 빈센트가 베르나르 등과 함께 사회주의 투사였던 탕기와 '행복과 사회적 조화의 시대'를 열망하면서, 그것을 일본에 투영하여 탕기를 마치 부처처럼 그린 그림이다. 눈을 내리깔고 두 손을 거머쥔 그의 모습은 바로 부처를 연상시킨다. 이런한 일본식 부처와 자연 및 생활에 대한 뚜렷한 동경은 빈센트가 하나의 이상 사회를 동경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그만큼 파리는 갑갑했다.

 

 또 하나의 초상화는 <카네이션을 든 이탈리아 여인>이다. 빈센트와 연애를 한 것으로 알려진 이고스티나 세가토리를 그린 이 초상화는 파리 시대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흔히 이 그림에 대해서는 누에넨 시절 이래 빈센트가 탐구해온 색채의 가능성이 잘 드러났다고 평한다. 이 그림만큼 조화로운 색채의 붓질로 집약된 교향악적 구조를 형성한 작품은 다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그림의 여인은 탕기의 그림과 함께 빈센트가 추구한 민중상의 전형으로 보인다

 

 당시 빈센트가 그린 <탕기 아저씨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시냐크와 베르나르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용히 앉아 있는 노인이 부처를 연상하게 하는 그 그림은 다른 한편 엄격한 색의 구분 위에 예리한 터치로 그려져 속박에서 벗어난 색채의 약동을 느끼게 한다. 주제의 조용함과 약동하는 기법 사이의 긴장으로 인해, 억제되지 않은 풍요로운 색채가로서 그가 처음 인정받게 되었다.

 

 빈센트는 고갱의 그림과 거침없는 말투에 당장 매료되었다. 그의 화려한 여행과 여성 편력 얘기에 빈센트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기도 했다. 그는 압셍트와 매독의 후유증으로 정신도 육체도 최악의 상태에 있었다.

 

 '나는 - 결혼하고 싶은 생각도 자식을 갖고 싶은 생각도 안 하게 되었다만, 그리고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했건만, 그래도 서른 다섯 살이나 돼 가지고 이 꼴로 있는 것이 때로는 우울하다.

 그래서 그림하고의 악연이 지겨워진다.

 리슈방이 어디선가 이런 말을 하더라.

 '예술에 대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을 잃게 한다'

 아닌게 아니라 옳은 말이겠지만, 그와 반대로 진정한 애정은 예술을 싫어하는 법이다.

 벌써 나이를 먹어 금이 가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림에 열중할 수 있을 정도의 정열을 아직 가지고 있다. 성공을 하려면 야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야심 따위는 시시한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될는지 모르지만, 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다- 장차 그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다. 너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내가 그린 것을 버젓이 남에게 보일 수 있도록 계속 발전시켜갈 작정이다.

 그리고 인간으로서도 참을 수 없는 숱한 환쟁이 녀석들을 안 만나기 위해서 남프랑스 어딘가에 틀어박히고 싶다.-1887년 여름 테오에게 보낸 편지

 

 한국은 물론 파리에서도 화가나 시인들은 예술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 경제적인 문제를 논하기가 십상이다.....

 남쪽은 멋지리라, 프로방스의 태양, 따뜻한 색채, 그리고 값싼 생활비로 다른 화가들을 그곳에 오게 하여 화가 공동체를 만들 수 있으리라. 그때 그는 사실 그 누구보다도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고갱을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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