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상달이었다. 강원도 동해시에서 친구 아들 결혼식이 있다기에 부산에서 열심히 차를 닦달하며 몰아 결혼식 시간에 겨우 맞추어 식장에 들어섰다. 사실, 같이 가기로 간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게 나타난 탓이었다. 넉넉하게 시간을 잡아두었었는데...
오랜만에 만난 고향친구들과 수인사, 안부인사도 나누고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결혼식 문화를 보면서 혼기에 찬 아들 생각도 나고 이런저런 세상사를 식후 디저트처럼 주고받기도 하다가 식장에서 제공하는 점심을 먹고는 경상북도 P군으로 향했다.
이건 미리 꼽아둔 일이었다. 한국에서 유교문화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 마을마다 맵시있는 한옥들이 위세를 뽐내고 있는 곳, 인근지역을 아울러 정신문화의 수도라고 자랑하고 있는 곳이기에 몇 번을 와도 다 보지 못한 곳이 남아있는 곳인 이곳은 또 다른 한국이 있는 곳이기에...
태백산맥을 넘어가기가 그렇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산골의 밤은 발이 빠르다. 읍내에 도착하니 벌써 불빛들이 보이고 기온은 영하 근처에 도달한 것 같았다. 잠자리는 좀 깔끔한 곳을 찾을까 하다가 벌써 어둠살이 읍내를 점령한 탓에 약간 꺼리는 맘을 누르고 빨간 불이 켜져 있는 모텔로 들어가 방을 잡았다. 숙박료는 비싸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보다 깨끗하고 깔끔한 게 맘에 들었다.
난 시골에 오면 항상 하는 행동이 있다. 시골 다방을 가보는 것이다. 거기에 가면 대개 이런 모습을 보게 된다.
실내는 그렇게 밝지도 않으며 커피나 차를 파는 건 뒷전이고 홀의 탁자 위에서 고스톱을 치거나 연탄불이나 부탄가스 버너 위에 시커먼 프라이팬을 놓고 그 위에서 삼겹살을 구워먹는다. 그리고 그 흔한 젊은 다방 아가씨는 없고 대충 차려입은 아줌마가 시울이 넓은 잔에다 넘치도록 커피를 타준다.
난 고약하게도 그런 아줌마를 마치 술판에서 밀려난 퇴기 정도로 생각하고 그녀의 인생사를 들어보고 싶은 의도이나 대개는 실패한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의 가사처럼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에 미련이야 있겠나마는...’이 감추고 있는 묘한 반전 같은 것을 기대해보기도 하고 약간 퇴영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도라지 위스키나 계란을 넣은 상투적인 쌍화차를 자신의 몫도 끼워팔아서 매상을 올리려고 하는 모습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 자연스레 그 동네가 품고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읍내의 수더분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다가 예의 버릇이 발동해 주인 아줌마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
“고향? 부산이요!”
“엥, 내가 부산 사는 데, 거기서 여기까지 시집을 오다니, 참 드문 경우 같소만...”
이어지는 그녀의 말투는 부산과 경북 북부 지방의 억양이 잘 배합되어 있는 듯했다. 부산에 살다가 남편의 고향인 이곳으로 왔다는 것이다. 근처에 다방이 있냐고 물으니 약간 눈동자가 커지는 듯하더니 근방에 있다고 위치를 알려준다.
다방은 읍내 시장 상가 속에 들어있었다. 그냥 박스처럼 만들어진 볼품없는 상가 가운데 하나였는데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팻말처럼 문위에 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네모꼴의 실내에 장식이라고는 없는 의자와 탁자가 대충 놓여있었고, 서울말을 쓰는 중년의 여자가 눈을 크게 뜨고는 호들갑스럽게 인사를 한다.
상상했던 쌍화차를 주문할 분위기도 아니고 삼겹살 구워먹는 사람들도 없고 고스톱 치는 사람들도 없다. 다방이 무슨 사무실 같고 주방이랄 것도 없었다. 어쨌든 시골커피를 연상하며 커피를 주문했다. 각진 서울말을 쓰는 다방 마담은 그런 나의 기분을 애초에 몰아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아가씨가 한 명 나타나 동석을 했기 때문이다. 커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아가씨와 몇 마디 섞지 않자 말투가 좀 이상해서 바로 물었다. 예의 그 버릇처럼.
“아가씨 고향이 어디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함경도요!”
“엉, 그럼 윗동네? 탈북민!”
저녁 반주로 몇 잔 마신 술이 확 달아나버렸다. 낯선 여행지에서 저녁에 몇 잔 마시는 소주는 정말 좋다. 어쩌면 그것은 낯섦에 대한 저어함을 용기로 바꾸어주는 효능이 탁월한 약 같은 것이다. 내가 섬 아닌 섬인 한국 땅에 살면서 윗동네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이다.
사실 난 아버지가 실향민인 친구는 여럿 있다.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그리고 고향땅에는 함경도 청진에서 6.25 때 내려와 유명한 찻집을 운영하면서 지역 사회에서 그림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또래들은 모두 실향민의 자손이고, 남한 땅에서 태어나 배우고 자라 나와 거의 동일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정치적 성향이야 조금씩 또는 상당히 다르기는 하지만 말이다.
내가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주인 마담이 재빨리 테이블 사이로 말을 찔러왔다.
“아가씨 한 명 더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난 얼굴을 고쳐 잡고 그러라고 했다. 친구와 같이 있는데 한 명 더 있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휴대폰으로 금방 연락이 갔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가씨가 한 명이 생글거리며 문을 들어선다. 커피를 한 잔 더 시키고 자리를 권했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아 보니 이 아가씨는 말투 속에 북한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고향을 물어보니 황해도란다. 그래, 황해도는 거의 수도권과 말투가 다르지 않구나...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그리고 사무실 같은 그 다방도 맘에 들지 않은 터라 술 마시러 나가자고 했다. 잠시 달아났던 술기운은 이제 새로운 용기를 부추기고 있었고 그들은 거부하지 않았다. 이젠 그래도 사내인 내가 객지에서 꿈꾸는 로망을 가장하여 퇴기 같은 주인 마담과의 걸쭉한 수작에 대한 기대는 이미 달아나버렸고, 그들은 어떤 사람인지, 우리와는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그리고 정작 왜 왔는지를 묻고 싶었다.
그들이 자주 가는 술집이 있는지 우리를 솜씨 좋게 데리고 골목길을 앞장 서 간다. 별스런 간판도 없는 술집에 당도하여 긴 주렴을 제치고 안에다 대고 뭐라고 말을 하더니 들어오라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니 술집 같지 않은 술집이었다. 오래 전에 가본 니나노집이 생각났다. 개방된 공간은 주방 정도이고 작은 방들이 몇 개 있었다. 그 중에 골방을 주인이 안내한다. 나에게는 흔히들 떠올리기 쉬운 남자의 음습한 욕망을 자극하는 구조가 아니라 유교문화가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이곳의 체면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 년 동안 P군에서 살아온 씨붙이들, 그리고 통혼으로 인척이 되어버린 많은 사람들을 이런 술집에서 만난다는 게 체면 깎이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술집도 이런 공간 배치를 하고 있다고 편하게 생각해두었다는 것이다.
방에는 커다란 아라비아 숫자를 잔뜩 달고 있는 무슨 농협 달력과 그 지역의 소주를 선전하는 사진이 걸려있었다. 찌개 같은 것을 안주삼아 시켰는데 마치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 금방 탁자 위에 올라온다. 그전에 볼품없는 안주로 소주를 마시다가 괜찮은 찌개가 나오니 안주가 나오니 얼마간 남아있던 어색한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사실 그들은 아가씨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빨간 투피스를 입은 아가씨는 미공급의 시기를 힘겹게 넘긴 흔적이 얼굴에 남아있었다.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짐작되나 설핏 보면 그 이상으로 볼 수 있는 여자였다. 회색의 긴치마를 입은 여자도 30대 중반으로 보였으며 상대적으로 활달한 모습이었다.
나는 그들이 필시 저녁을 제대로 먹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고 주인에게 밥을 달라고 하였다. 그들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곧 밥이 두 공기가 나왔고 그들은 찌개와 함께 저녁을 맛있게 먹으면서 우리가 건네는 몇 마디 말에 성의를 넣어서 응대해주었다.
“가족들에게 돈을 보냅니까?”
“얼마나”
“...”
“일년에 몇 백만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다.
나의 버릇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국사 시간에 민족 교육을 철저히 받았던 탓에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가면서 옛 조선사회를 이끌어가던 사대부들의 어리석음과 위선이 드러날 때마다 유교문화의 어두운 구석, 비실용적인 가치관, 턱도 없는 계급적 사고방식에 대해 수도 없이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그러나 조금만 눈을 넓혀 보면 그 당시 세계 어디에도 근대의 씨앗이 뿌리 내리기 시작한 곳은 거의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를 제외하고는...그러나 미국도 출발은 철저히 백인 남성 중심이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근대의 모습은 그리 오래 된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우리 조상들을 깎아내릴 일도 아닌 것이다.
난 내가 어설픈 민족주의자라는 사실을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말해둔 게 있다. 이미 세계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은 이 나라에서 민족주의자는 촌스럽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나 지금 힘쎈 나라들이 하는 꼴을 보면 그 촌스러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지 않은가.
‘좋다, 통일될 때까지 난 민족주의자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 거야’
난 그들에게 통일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다그치듯 물었다. 그들의 답이 뻔할 걸 알면서도 말이다.
“통일이 되어 힘쎈 나라들로부터 무시당하지 않고 사는 게 좋지 않겠소?”
말 속에는 내가 지금까지 보고 읽고 배운 것으로부터 출발한 우리 민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담긴 역사에 대한 청구서 같은 것이 들어있다.
그들의 얼굴은 처음에 다방에 들어섰을 때 얼굴, 술집에 들어섰을 때의 그것이 아니었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으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기쁨 같은 것이 입가에 돌고 있었다.
그 이야기 와중에 난 시인 백석에 대해 물었다. 백석을 모르기에 본명 백기행을 들이대고 인터넷을 뒤져 사진까지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한 명은 알고 한 명은 모른단다. 아는 한 명은 학교에서 배웠단다. 내가 아는 최고의 시인은 백석이다. 말을 줄줄 늘어놓은 것 같은 문장인데, 다 읽고 나면 무릎을 치게 만드는 절묘한 능력의 소유자. 일제 강점기 당시 굶주림에 시달리던 가족을 그린 ‘여승’을 읽어주고 아느냐고 몰아세웠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대답으로 돌아왔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고 연설조의 내 이야기가 그들에게 더 이상 흥밋거리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자꾸 시계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냉정한 현실이 그들의 앞에 놓여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다방을 나올 때 마담이 뒤통수에 대고 뭐라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난 그들에게 지폐 몇 장을 안겨주었다. 연설조의 내 이야기는 끝났고, 술잔은 채 비워지지 않은 채 먹다 남은 찌개 옆에 놓여있었다.
“잘 사시오...”
우리는 그들을 보내고 한 잔 더 할까하고 망설이다 그냥 일어났다. 이미 술이 임계치를 넘어 내 몸속으로 들어갔고, 열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왜 왔는지도 묻지 않았으며 윗동네에서 뭘 했는지도 묻지 않았다. 하나는 물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며 하나는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모텔로 가는 길은 그 다방을 지나쳐야 했다. 유리창으로 빨간색 투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보였다.